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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고향에 선물 한 보따리 안긴 '팔순 콜렉터'의 미소

2016.10.27

[머니투데이]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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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사진=임성균 기자

유상옥 코리아나 화장품 창업회장, 백제문화체험박물관 개관 맞아 소장 유물 209점 …기증.

서울에 사는 팔순의 노인이 최근 고향에 선물을 보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 인근에 들어설 박물관에 전시할 토기 유물이다. 그는 오는 28일 개관 예정인 충남 청양군청의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유물 209점을 기증했다.

그는 “설레요” 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누에 치고 목화를 따고 밭일을 돌보던 고향 마을 인근에 들어설 박물관.

그는 1933년 충남 청양의 농가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논 한 마지기에 쌀 두 섬 나오면 잘 나오는 곳, 가족들이 밥을 다 못 먹고 왜놈들은 뺏어가던 곳이지.” 하지만, 그 고향이 문화 시설을 일구는 힘의 근원이 됐다.

50대 나이에 퇴직금으로 창업, 화장품업계 성공신화를 일군 유상옥 코리아나 화장품 회장(83)은 이렇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문화를 일구는 박물관 인으로 산다.

그의 집무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스페이스씨(코리아나 미술관 및 코리아나 화장 박물관 소재지)에 있다. 집무실 테이블에는 고려 시대 청자소문접시와 청자문화국잔이 놓여있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이 코리아나 화장 박물관에서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소개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내가 돈 없이 창업했어. 퇴직금 1억 얼마를 받아서 그걸로 중견 기업을 일군 게 첫 번째야. 두 번째는 박물관 미술관 만들어 문화활동 한 거겠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두 가지로 창업과 박물관·미술관 개관을 꼽는 그다. 중절모를 즐겨 쓰고, 썬 크림도 바른다는 이 ‘멋쟁이 노인’은 살면서 맛본 고배가 자신을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해 열심히 일했어. 계열사인 라미 화장품 대표까지 올랐지. 내가 퇴사를 하게 된 것은 3박 4일간 이어진 노사 분규 때문이었어. 죽을 맛이었지. 잘하는 아이들이 나와서 별소리를 다하면 월급을 올려달라고 한 거야. 내 기억에 사원 측에 9.7% 인상안을 제시로 했고, 이게 잘 수용됐지만 화근이 됐지. 내가 좌천을 당했어. ‘이제 그만해라. 데모나 받아준다’는 말을 들었던 거지. 알고 보니 내가 월급을 36% 가까이 올렸다는 거짓 보고도 윗선으로 올라갔지 뭐야.”

제약사를 찾은 것도 화장품업종을 맡은 것도 모두 처음부터 의도한 인생 여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고려대 상대 출신인 그는 ‘돈 잘 버는’ 은행원이 되려는 생각으로 몇 차례 입사원서를 냈으나 거듭 낙방한 이후 당시 용두동 거주지와 가까운 동아제약에 이력서를 넣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 /사진=임성균 기자

회사 좌천은 그에게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 경험을 살려 ‘한 우물’을 판다는 정신으로 일했다. 1988년 서울 종로구 예일빌딩의 30평짜리 사무실, 전화기 2대, 영업사원 5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코리아나 화장품이다.

하 도급 공장보다 못한 여건에서 출발했지만, 5년 만에 매출액 1000억 원을 돌파하며 500대 기업에 진입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4000억 원에 달하는 매출액도 올렸다. 화장품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자도 됐다.

2003년에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선보이기 위해 스페이스씨도 개관했다. 이곳에 미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관련한 화장 유물들을 전시하는 화장 박물관을 세웠다.

“코리아나화장품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어요. 코리아나화장품은 제조 및 판매업체지만 이 같은 실질적인 활동 외에 문화활동을 하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원찮은 회사 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하겠습니까.”

그는 40여 년 간 회화, 도자기, 유화, 조각, 화장 용기, 화장 도구, 도자기, 장신구 등 미술품을 수집했다. 동아제약 재직 시절 듣게 된 한 양복업자의 충고가 계기가 됐다. 당시 과장이던 그에게 양복업자는 “이성은 풍부한 듯하지만, 감성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앞만 보며 달리던 그에게 정곡을 찌른 말로 들렸다. 미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고 미술품 수집에도 힘을 쏟게 한 그 한마디를 그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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