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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포스트 단색화가' 김태호 "그림은 돈으로 되는 게 아니다"

2016.12.08

[뉴스1] 김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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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단색화가'로 주목 받고 있는 김태호 화백이 2일 서울 목동 작업실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2016.12.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한국의 아트파워 ⑦] 서양화가 김태호

"여러 곳에서 그림을 달라는데 다 줄 수가 없어요. 전시도 줄줄이 있고. 심지어는 수십년 전 동창생 통해서도 전화가 와요. 그림 구해달라고. 이렇게 바쁠 줄 몰랐죠."

1948년생인 김태호 화백은 1930년대생 '단색화' 화가들을 잇는 '포스트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노화랑과 가나아트에서 그를 밀고 있다. "작품이 한번 작업실 밖으로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는 칠순을 앞두고 국내 화단에서 가장 '핫'한 작가가 됐다. 캔버스에 물감을 수없이 쌓고 다시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내재율' 시리즈는 최근 시장에서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컬렉터가 있는가 하면, 그의 작업실에 그림값부터 던져놓고 간 컬렉터도 있다.

국내 대표 단색화가인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팔던 일본 '미즈마갤러리'도 최근 그에게 '콜'을 했다. 내년 3월 '동경아트페어'에 김태호 화백의 작품을 들고 나가겠다는 거다. 김 화백의 말에 따르면 미즈마갤러리는 내년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서 김태호 화백화 함께 일본 작가 코사이 호리(Kosai Hori)의 2인전을 추진 중이다. 코사이 호리 역시 일본의 '포스트 모노하'(物派)를 잇는 작가로 꼽힌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장을 역임한 김 화백은 지난 8월 정년 퇴직한 후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밀려드는 주문에 병원 갈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그를 최근 서울 양천구 목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포스트 단색화가'로 주목 받고 있는 김태호 화백이 2일 서울 목동 작업실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2016.12.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단색화, 그리고 포스트 단색화

오늘날 한국 화랑은 둘로 양분된다. 단색화를 취급하는 화랑과 그렇지 않은 화랑. 지나친 '단색화 쏠림' 때문에 화랑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제가 볼 때는 그래요.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정상화 등 단색화로 뜬 작가들을 보면 모두 다 자기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했어요. 서양화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서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자기만의 기법이죠. 게다가 그들은 1000점 이상의 많은 작품을 했고요. 그걸 그동안 선보일 기회가 없었는데, 국제갤러리가 '베니스 비엔날레' '바젤 아트페어' 등에 그들의 작품을 내보내면서 해외 컬렉터들의 눈에 띄게 된 겁니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수준이 높다"고도 했다. "한국만이 갖는 독특한 정서가 있어요. 달항아리나 장식없는 목기 같은, 덤덤하면서도 독특함. 없는 것 같으면서 있고,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 존재감이랄까요. 박서보 선생만 해도 단순히 색채의 단색화가 아니라 '행위의 반복에 의해서 나타나는 수행의 결과'인데, 그게 지금에 와서 높이 평가되는거죠."

'포스트 단색화가로 주목받으며 돈도 많이 벌었겠다'는 질문에는 손사레를 쳤다. "그림 1억원에 팔면 50%는 화랑이 가져가고, 남은 50%에서 또 38%를 세금으로 내요. 여기에 재료비까지 빼면 남는 게 없어요. 남들은 대단히 큰 돈이라도 버는 줄 알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다만 남들에게 밥 살 수 있는 위치가 되니 그건 좋네요."

그는 그러면서 "돈 버는 건 기술이고 돈 쓰는 건 예술"이라며 "돈은 쓴 만큼 번 것이지 갖고 있다고 번 게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온 게 참 좋다"는 거다.

'포스트 단색화가'로 주목 받고 있는 김태호 화백이 2일 서울 목동 작업실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2016.12.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그림 아무나 사지 마라…그림에도 임자가 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단색화'나 '포스트 단색화'가 시장의 측면에서 기획된 반짝 '테마주'라는 지적도 있다. 김 화백 역시 '잘 팔릴 그림'이라는 소문에 컬렉터가 몰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에 김 화백은 "그림에도 임자가 따로 있다"고 했다.

"안목 없는 사람은 좋은 걸 권해도 잘 몰라요. 저는 그럼 돈 돌려주고 그림을 도로 갖고 오죠. 공짜로 준 그림들이 시장에 흘러나오는 거에요. 그림 값이 오르고 돈이 되니까 물건처럼 파는 거죠. 진짜 좋아서 그림을 산 사람은 시장에 안 내놔요. 정말 형편이 어려워지면 그때 내 놓죠. 그럼 그 작품 제가 다시 삽니다. 비싸게 되산 그림이 지금도 이 작업실에도 있어요."

그는 그의 그림을 주로 취급하는 노화랑의 노승진 대표 역시 '아무에게나 그림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김 화백의 그림이 아무데나 돌아다니는 게 싫기 때문'이라고. 김 화백은 "1~2년 내 팔아서 얼마라도 남길라고 하는 건 '장삿꾼'이지 컬렉터가 아니다"라며 "잘 팔린다니까 남들 따라 '사재기'하는 게 제일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스위스의 한 부호의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 초대돼 가 봤더니 온갖 좋은 물건들은 다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림 걸려 있는 걸 보니 '안목'이 없는거에요. 다른 건 다 돈으로 해결되지만, 그건 돈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노력해야 되요. 관심을 가져야 하고요. 자꾸 전시도 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포스트 단색화가'로 주목 받고 있는 김태호 화백이 2일 서울 목동 작업실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2016.12.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그를 있게 한 건 스승들, 그리고 '꿈'

최근 가장 인기가 높은 '내재율' 시리즈가 나오기까지, 김 화백은 끊임없이 평면 작업에 변화를 꾀했다. 1970~80년대 스프레이를 사용한 에어브러시 기법으로 '형상' 시리즈 작업을 하다가 종이를 이용해 두터운 질감을 내고, 다시 종이 대신 물감으로 그 질감을 대신하기까지 그의 작업 방식은 일관된 맥락 속에서 꾸준히 변화해왔다. 1978년 이후 작업을 총망라한 3권의 '전작도록'을 체계적으로 갖출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건 무엇보다도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유영국 같은 '스승'들이다. 고교시절 박서보 화백으로부터 사사받으며 추상의 세계에 일찍 입문했다.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작업에서 추상으로 변모하게 된 게 박 화백의 조언 때문이었다. 100호 이상 대작으로 규모를 키운 건 하종현 화백의 영향이다. 그는 스승들의 조언에 따라 작업 방식을 바꾸고 작업량을 늘렸다. "대한민국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다 배웠다"고 했다.

"스프레이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물감이 말라야 그 위에 테이프를 붙이니까. 한 작품에 1년 가까이 걸리죠. '이래 갖고 큰 작가 되겠냐'고 하신 게 유영국 선생이었어요. 그 덕에 재료를 바꿨죠."

그는 198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정상화 화백의 일화도 꺼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시 출·퇴근하며 그림을 그리시더라고요. '천천히 쉬었다 하시라'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 그림이 미술관에 하나 들어가려면 적어도 천 몇백점은 그려야 한다'고요."

그는 "좋은 스승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양분이 돼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역시 후배 화가들에게 조언했다.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전시장에서 어떤 전람회를 하고 싶다' 같은. 전시장에 작품 300점을 걸려면 적어도 1000점은 해 놔야 그 안에서 고를 수 있는 거고요. 목표를 세우고 성실히 작업하다보면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화랑주를 찾아가 당당히 물어보세요. '여기서 전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젊다는 게 뭡니까. 부딪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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