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는 2021년 7월 21일(수)부터 8월 22일(일)까지 학고재 아트센터 및 학고재 오룸(OROOM, online.hakgojae.com)에서 김길후(b. 1961, 부산) 개인전 《혼돈의 밤》을 개최한다. 학고재가 여는 김길후의 첫 개인전이다. 김길후가 역동적인 붓질로 그려낸 근작 회화와 조각 작품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김길후는 지난 4월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하여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새롭게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 수상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위원장 최형순(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관장)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거침없는 필선의 속도가 강력하다"며 "붓이 머금고 있는 물감 묽기는 스스로도 흘러내릴 듯 자유롭고 작가의 붓 길도 거침없게 해 주고 있다”고 평했다. 시상에 부쳐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미술평단』(2020 겨울호)에 기고한 「치유로서의 그림」(2020)을 이번 전시 도록에 수록한다.
- 전시 주제
혼돈의 밤: 원시의 혼돈을 가로지르는 김길후의 붓
1999년, 김길후는 자신의 작품 1만 6천여 점을 불태웠다. 기존의 방식을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화면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13년도에는 이름을 김동기에서 김길후(金佶煦)로 개명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탈바꿈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이다. 김길후는 “예술 표현의 핵심은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는 데 있다”고 믿는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노동과 놀이가 일치된 상태이자, 의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행위”를 행해야만 진정한 예술적 표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혼돈의 밤’은 만물의 소생에 앞선 원시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김길후는 관습을 잊고 본성의 마음으로 회귀하고자 노력한다. 만물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주조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김길후의 회화는 그린 이의 몸짓과 호흡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제와 대상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두한다. 특유의 질박한 필치로, 문명 이전 혼돈의 세계를 화면 위에 펼쳐낸다. 일필휘지의 필법에 찰나의 직관이 실린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숱한 덧칠로 이루어지는 서양의 그림과는 달리 김길후의 그림은 일획으로 이루어진다”고 언급하며, 그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는” 붓질이 “한국의 사극에 등장하는 검객의 칼 솜씨”와 같다고 비유했다. 김길후는 “붓을 들고 흐드러지게 진한 춤을 추는 무당”처럼 자신의 호흡과 직관을 회화의 물성으로 펼쳐낸다.
김길후의 최근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
이번 전시는 김길후가 수년간 연마해온 예술적 표현의 결실을 내보이는 자리다. 최근까지 베이징에 거점을 두고 작업한 김길후의 작품세계를 국내에서 조명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길후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면으로 중국 미술계 내에서도 꾸준히 두각을 드러내왔다. 지난 2014년에는 베이징 화이트 아트박스 가 김길후의 대규모 개인전 《심인(心印) – 김길후의 회화》(2014)를 개최했다. 당시 왕춘천(王春辰, 중국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이 전시 기획을 맡았다. 왕춘천은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2013)의 중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한 큐레이터다.
김길후는 최근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새롭게 받고 있다. 올해 4월,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9년 첫 수상자로 조각가 정현을 배출한 이후 매년 예술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가를 선정하여 시상하는 상이다.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김길후가 2021년에 제작한 회화 19점 및 2014년도에 그린 회화 1점,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제작한 삼발이형 인물상 3점 등 총 2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학고재 오룸(OROOM, online.hakgojae.com)에서 동시 개막하는 온라인 전시에서는 오프라인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들을 포함하여 총 42점의 회화를 살펴볼 수 있다.
- 작가노트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무』(1943)에서 “자아는 의식에 머무는 거주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무언가에 진정으로 몰두하게 되면, 의식은 비로소 저 먼 우주의 끝과 깊은 해저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식은 다른 사물처럼 주어진 정체에 머물지 않으며, 관습에 의해 고착된 본질을 넘어서는 탈존(脫存)의 움직임을 보인다. 의식에는 주인이 없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순수 의식을 탐구한다. 실상 자아가 의식의 주인처럼 보이는 것은 본연의 순수한 의식이 오염된 탓이다. 어린 아이는 몰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의식한다. 아이의 자아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교육, 사회적 관습 등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이드 및 초자아와 상호작용하면서 자라난다. 성인이 된 의식은 스스로 자아로부터 통제를 받는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술 표현의 핵심은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는 데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아무런 목표 의식 없이 짐을 실어 나르는 ‘낙타’와 같은 상태로부터 관습을 부정하고 대항하는 ‘사자’를 지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변신해간다. 아이는 창조의 행위를 한다. 공기놀이에 푹 빠진 아이의 마음처럼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순수하게 몰두할 때 비로소 자아를 비워낼 수 있다. 노동과 놀이가 일치된 상태이자, 의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행위다. 바닷물에 휩쓸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모래성을 다시 쌓아올리는 일과 같다.
후설은 자아를 ‘선험적 자아’ 즉 순수 의식과 ‘경험적 자아’로 구분하면서, 그중 전자를 지향했다. 자아가 그림 그리는 주체를 통제하고 검열한다는 생각은 자아와 대상을 분리하여 바라보는 이원론적 태도를 전제한다. 이는 곧 경험적 자아다. 반면 후설이 강조한 선험적 자아는 비(非)자아의 상태를 가리킨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로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일원론적 태도다. 화가의 자아는 그리는 행위의 의식을 검열하여서는 안 된다. 의식이 비(非)자아 상태에 이를 때, 그림은 비로소 현상학의 토대 위에서 창조된 작품으로서의 맥락을 획득한다. 동양의 물아일체(物我一體), 불교의 삼매(三昧)의 경지와도 맞닿는 생각이다.
근작 화면에서 형상은 해체되지만, 이를 추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추상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이원론적 태도를 고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개념의 정의는 작가의 철학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일어나는데, 그 기반의 구축 또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화면은 구상도 추상도 아닌, 나아가 구상일 수도 있고 추상일 수도 있는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의식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했다. 나는 의식을 완전히 비워낸 상태를 확립하는 것이 작업의 가장 주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아이가 공기놀이에 몰입한 상태와 같은 마음을 투영하는 일이다. 행위만이 남을 때, 그림이 완성된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는 이루기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다”라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호흡을 취득하기 어려우나 그것을 체득하기가 더 어렵다.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우화가 있다. 포정(백정)은 19년이라는 세월 끝에 소를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칼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소에게 고통조차 주지 않는 경지였다. 포정은 완벽에 도달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정이 말하기를 “비록 도축에 능숙하다 한들, 매번 살과 뼈가 엉킨 자리에 이르러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한다.” 그림을 그리는 매순간 관념을 떨치고 순수한 행위만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자아는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개입한다. 빈 캔버스를 응시하는 순간마다 끝없이 두려워하고 긴장하며, 삼매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