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박현주
2015.08.30
[뉴시스] 박현주
석철주 화백이 올해 새롭게 작업한 '신몽유도원도'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5-08-24
16세 때부터 청전 '무릎제자'로 활동
"먹물 마르지 않게 작업해라" 교육받아
교수이자 작가 '다작 작가'로 유명
화업 30년기념 고대박물관서 개인전.
"작가는 모름지기 그야말로 벼루에 먹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작업해야 한다."
1972년 한국화 거목 청전 이상범 화백은 그에게 이 말씀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생전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서도 작업을 하셨던 스승. 그는 그 말을 명심했다.
'다작 작가'로 유명한 한국화가 석철주(65)화백은 보자마자 스승의 이야기를 꺼냈다.
"작업에 대해서 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요.1년에 100호 이상 대작을 200점을 그리기도 했지요."
벌써 50여 년전, 그는 여전히 마음으로는 청전의 그늘에 있는 듯 했다. "방충망 너머로 보았던 스승의 모습이 떠오른다"면서 "신작 '신몽유도원도'는 그 때 그 시절 선명하지는 않지만 신비하게 보였던 그 모습 때문에 나온 작업"이라고 했다.
2005년부터 시작한 '신몽유도원도'는 올해 또다른 변신을 꾀했다. 화면을 보일 듯 말듯한 촘촘한 망 구조로 마무리한 대작들이다. 기존의 신몽유도원도가 형태가 뭉개진 몽롱한 형상이라면, 이번 그림은 형상앞에 망이 처져 있음에도 웅장한 산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000년부터 연작해온 '신몽유도원도'는 올해 새롭게 변신했다. 설악산풍경등 형상이 구체화된 화면은 촘촘한 망구조로 마무리한 대작들이다. 2015-08-24
"나는 '어깨 너머로 본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죠." 석 화백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냈다.
16세 때였다.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운동을 접어야 했다. 아버지는 꿈을 접은 아들이 안쓰러웠다.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의 한옥을 수리하던 아버지는 청전에게 청을 넣었다. "소일삼아 그림을 배우게 해주시면…". 그렇게 시작된 청전과의 만남은 운명이 됐다. 스승이 작고할 때까지 6년, 전통산수화를 익혔다. 일명 이상범의 '무릎제자'가 된 그는 동양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됐다.
전통적인 방식의 사제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였지만 그는 내세우지 않았다. 스승과의 거리를 두려고 했다. 늦은 나이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대 초 작가로서 첫 발을 디딜 당시는 한국화 분야에서 수묵화 운동이 확산되고 현대화를 위한 방법론 논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동양화 틀을 벗어났다. 그의 대표작 '생활일기'시리즈는 먹과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거나 광목천에 바느질하는 등 매체적 실험을 병행했다.
지금도 그는 먹을 쓰지않는 한국화가다. 서양화의 대표적인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묘하게도 작품은 전형적인 한국화같은 분위기가 강하다.
'신몽유도원도'는 그의 매체실험의 정점이다. 동양화의 전통장르인 산수화를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소위 '물로 그린 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출했다. 원하는 바탕색을 칠한 뒤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덧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물이 담긴 에어건을 쏘아 형상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넓은 평붓으로 훑어낸 뒤 끝마무리를 하는 작업이다.
평론가들은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한다. 상당부분 직관에 의존하며 물과 안료의 상호작용에 의한 우연적 결과를 세심하게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필묵을 다루는 오랜 숙련 과정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신작 '신몽유도원도'는 관념산수다. 설악산 능선, 지리산 풍경, 구곡폭포 등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됐다.
15년 전 무릎이 고장났다. "연골수술을 했죠. 걷기는 하지만 산행은 힘들게 됐어요."
20대 때 스케치했던 풍경을 꺼냈다. 그렇게 다시 그려진 '신몽유도원도'는 화면 분할이 되어 나타났다. 위에는 사실적인 풍경(현실)이, 밑에는 색만 있는 여백(이상)이 담겼다 ."연두색, 핑크색으로 나온 색은 계절을 표현한 것인데, 색을 채우는 건 비우는 것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신몽유도원도 15-22, 캔버스ㆍ아크릴릭ㆍ젤, 194×130㎝, 2015 [사진제공=고려대학교 박물관] 2015-08-24
미묘한 색감으로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조율하고 있는 화면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어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는 "마치 그림이 꿈같기도 하고, 그림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다"면서 "석철주의 회화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실재와 환상이란 회화의 오랜 논쟁, 회화와 장식의 구분에 대한 현대적 논쟁, 동양화의 정체성에 관한 복합적인 문제를 성찰하는데 있다"고 설명했다.
석화백은 1990년대 '독(항아리) 그림'으로 미술기자상을 통해 주목받은후 현대적 화풍의 한국화가로 부상했다. 이후 규방시리즈 '생활 일기'등 5년마다 주기적으로 그림 변신을 해왔다.
"열심히 작업을 하자가 목표였죠. 저의 이야기를 찾아서 끊임없이 작업하면서 작가는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 신세대들이 사진기, 핸드폰,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통해 세상을 보듯, 이번 작품들 역시 '픽셀화된 디지털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변신할 것입니다"
그는 "이제 더 작업할 일만 남았다"고 했다. 올해로 28년을 근무한 추계예대 교수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스승의 말씀처럼 교수직에 있으면서 늘 쉼없이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공허함은 없어요. 다만 '추계 1기 학생이자, 추계 출신 1호 교수'로서 학교를 떠나는 자리에서 후배들 지도가 약했던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바짝 마른 몸매에 헐렁한 옷차림, 턱을 감싼 하얗고 검은 짧은 수염이 정돈된 그는 무협지에 나오는 '도인'같은 모습이다. 흐트러짐없는 자세로 말을 잇던 석 화백이 오른팔을 자꾸 쓰다듬었다. "작업량이 충분한데도 욕심일 수도 있지만 무리를 해서인지 팔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네요."
올초부터 한국화가를 집중 조명하고 있는 서울 안암동 고려대박물관이 석 화백을 초대했다. 그의 30여 년 화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꾸민다. 오는 9월 10일부터 '몽-중-몽(夢中夢)'을 타이틀로 초기 '독 그림'부터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신몽유도원'까지 총 100여점을 입체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가나아트센터,학고재화랑, 금산갤러리, 박영덕화랑, 동산방화랑이 후원해 눈길을 끈다. 'K-아트' 대세속 국내 미술시장의 역량있는 5개화랑이 뭉쳐 석철주화백을 한국화의 스타작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석 화백의 작품 가격은 호당 60만원선으로 100호는 3500만원(전시가격)이다. 전시는 10월18일까지 이어진다. 02-3789-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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