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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백남준의 친구들…나이를 떠난 우정과 존경

2016.02.01

[뉴스1]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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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일본 도쿄에서 만난 요셉보이스(죄측)와 백남준 ©Paul Garrin

백남준 예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1912~1992)가 완전히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1921~1986)가 거의 무명일 때 나는 이들을 만나 놓았다. 동지로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동등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백남준은 생전에 20살 터울인 존 케이지와 11살 차이가 나는 요셉 보이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우정을 쌓는데 나이는 상관없었다. 존 케이지는 1952년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터를 통해 아무 건반도 누르지 않은 채 앉아 있기만 하는 희대의 연주 '4분33초'를 발표, 서양음악사에 충격을 준 현대음악가다. 요셉 보이스는 '플럭서스 운동'을 이끈 독일의 현대 미술가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셈이다. 이들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된 백남준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지난 29일 타계 10주기를 기념해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와의 활동을 중심으로 백남준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살펴봤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수송 국민학교와 경기 보통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그의 가족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으로 이주했다. 1952년 도쿄대에 입학한 백남준은 미술사학 및 음악사학을 전공해 졸업 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을 썼다. 존 케이지의 스승이기도 한 쇤베르크(1874~1951)는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자이자 음악 이론가였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백남준은 우연히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를 만난다. 이들의 예술관은 백남준이 행위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후 비디오 아트의 저변을 형성했다.

존 케이지는 당시 독일 정부의 초청을 받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에서 강연 중이었다. 청중의 한 명에 불과했던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음악세계를 접하고 번개를 맞은 듯 쇼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백남준은 이후 고전적 작곡에서 탈피해 당시 새로운 음악인 행위음악에 들어섰다.

백남준이 데뷔한 1959년 11월 13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퍼포먼스의 제목만 봐도 존 케이지에 대한 존경심을 잘 알 수 있다. 이 공연의 제목은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보내며'였다. 이후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며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서양음악의 상징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퍼포먼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백남준은 공연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렸다.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행동은 일반적 상식에선 무례한 짓이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장시키려는 시도였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의도를 이심전심으로 알았기에 기쁘게 받아들였다. 백남준은 "피아노는 연주할 수도 있지만 부술 수도 있다. 마찬가지다. 넥타이는 맬 수도 있지만 자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퍼포먼스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1960)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백남준(좌측 사진), 공연 후 웃고 있는 존 케이지 ©클라우스 바리쉬(K. Barisch)

요셉 보이스는 1960년대 조지 마키우나스, 백남준 등과 함께 행위예술의 한 형태인 '플럭서스'(Fluxus) 예술운동을 이끌었다. 플럭서스는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다. 플럭서스 운동은 기존 권위에 반대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전선자 성균관대 교수는 "플럭서스 운동은 엘리트 예술을 반대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1964년 이후 새로운 예술형태를 만들어갔다. 플럭서스는 직선적인 과학과 권위가 만들어놓은 신화를 깨고, 모든 전통개념에서 자유롭고, 창작자와 수용자가 일체가 되길 원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미래를 사유하며 사회를 변화시키길 바랐다"고 말했다.

음악, 문학, 연극 등 다양한 예술이 상호 결합하는 플럭서스 운동의 형태는 1962년 6월16일 독일 뒤셀도르프 캄머슈필레 극장에서 열린 백남준의 퍼포먼스 '음악에 있어서 네오-다다'에서 잘 드러난다. 바이올린 독주를 마친 백남준은 약 3분에 걸쳐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내리쳐서 부숴버렸다.

요셉 보이스는 이날 퍼포먼스를 끝낸 백남준에게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에서 첫째 날은 백남준 개인전을, 둘째 날은 플럭서스 그룹전을 열자"고 제안했다. 보이스가 백남준을 얼마나 인정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정신을 거론하며 개인전을 거절했다. 백남준은 "플럭서스는 모든 구성원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개인의 자아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평등한 단체이니만큼 이틀 밤을 모두 플럭서스에 할애하자"고 말했다. 보이스는 백남준의 역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선보인다. 이 개인전은 13대의 TV를 실험적으로 활용해 '비디오 아트'를 보여준 첫 전시로 평가를 받고 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설치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 대표작을 선보였다. 특히 1984년 1월1일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졌다. 또한 1993년 독일 작가 한스 하케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돼 국가전시관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세계적 거장으로 평가를 받게 된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와의 우정과 존경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로봇 연작의 하나인 '존 케이지'와 추모굿 '늑대 걸음으로'가 바로 그것이다.

1990년 작 '존 케이지'에는 '운명적 상봉'(運命的 相逢)이란 문구를 적혀 있으며 피아노 부품을 이용해 존 케이지의 음악 세계를 상징했다. 같은 해, 백남준은 평생의 친구였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며 갤러리현대 뒷마당(현 금호미술관)에서 추모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선보였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백남준은 보이스가 즐겨 쓰던 중절모를 시멘트로 16개 제작했다.

백남준, 로봇 연작 중 '존 케이지' (사진제공 갤러리현대)

추모굿 '늑대 걸음으로' (1990). 병풍 속에 중절모를 쓴 요셉 보이스의 사진이 있다. (사진제공 갤러리현대)

박정환 기자(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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