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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국민 화가' 이중섭의 전 생애 작품 200여점 한자리에

2016.06.03

[뉴스1] 박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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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도(鄕道), 1939, 종이에 유채, 개인 소장. © News1

국립현대미술관 6월3일~10월3일 탄생 100주년 기념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
"1972년 갤러리 현대 이후 44년만에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60여곳서 작품 대여"
대표작 '소' 연작 비롯해 부인에게 보낸 편지 등 생애 보여주는 자료 100여점도 공개.


사진 속 그림은 '국민 화가' 이중섭이 그린 '향도'(鄕道)라는 작품이다. 이중섭이 1939년 일본 도쿄 '문화학원' 유학 시절에 일본 화가 아라이 타츠오에게 줬던 그림이다. 두 작가는 서로의 작품을 맞교환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향도'는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이 올해 이중섭(1916~56)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관에서 개최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3일부터 10월3일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에서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해 총 60개 소장처에서 산발적으로 보존되고 있던 이중섭의 원작 200여 편을 대여해 모았다. 또 100여 점의 자료도 함께 전시해 그동안 이미지로만 알려졌던 이중섭의 실제 작품과 그의 생애를 대중과 전문 연구자들에게 낱낱이 공개한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전시 개관에 앞서 2일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의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 News1

이번 전시를 준비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전시 개관에 앞서 2일 덕수궁관에서 진행한 설명회에서 "이번 전시는 1972년 갤러리 현대 이후, 44여 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이중섭 개인전으로 당분간 좀처럼 보기 힘든 전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또 "1970년대 '우리도 국민 작가 한 사람쯤 가져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이중섭의 신화가 과장돼 만들어진 측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일부에서 제기된다"며 "하지만 이중섭의 유화에서 느껴지는 우리나라 미술의 전통이라든가 새로운 기법인 은지화 등을 보면 왜 많은 이들이 이중섭을 좋아했는지 느낄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중섭의 자화상.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 News1

전시는 이중섭의 생애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구성돼 있다. 이중섭은 1916년 9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1937~41년 일본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수학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귀국했고 1945년 문화학원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했다.

김 학예사는 "1950년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원산에서 피란을 내려오면서 이중섭은 그때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하나도 가지고 내려오지 못했다"며 "이로 인해 전시의 1부 '1916-50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 시기 작품들은 일본 유학기의 애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원산 거주 시기 해방 직후 제작된 연필화 등이 전시된다"고 밝혔다.

<신화에서>, 1941, 종이에 청먹, 채색, 9 x 14cm, 개인소장 (이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News1

<세 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 x 28.0, 개인소장. © News1

이중섭은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란시절을 보냈다.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보낸 1년간은 매우 가난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하며 좋은 작품을 남겼다. 이후 부산으로 와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2부 '1950-53 서귀포, 부산'에는 '봄의 아동'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등 어린아이와 동식물들, 자연의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진 환상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봄의 아동>, 1952-53, 종이에 연필, 유채, 32.6 x 49.6, 개인소장 © News1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7.0 x 36.4, 개인소장 © News1

'3부 은지화'에선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다양한 은지화 작품 40여 점을 감상하게 된다. 은지화란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되는 그림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파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소묘(드로잉)가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김 학예사는 "72년 이후 처음 공개되는 '소와 여인' 등 이중섭의 은지화에는 에로틱한 '춘화'가 많다"고 말했다.

3부에선 또 작은 은지화를 기가픽셀 촬영해 16m의 벽면에 영상으로 구현했다. 이중섭은 은지화들을 밑그림으로 ‘벽화’를 그리고 싶어 했는데, 그의 꿈을 현대의 영상 기술로 보완한 것이다.

<두 아이>,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5 x 15.5, 개인소장 News1

<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유채, 새김, 8.3 x 15.4, MoMA 소장 Number 57(1950-52).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MoMA). Gift of Arthur McTaggart. Acc. A.: 27. 1956. ⓒ 2016. Digital image,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Scala, Florence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1954년 6월경까지 이중섭은 공예가 유강렬(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 때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들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제작됐는데, 4부 '1953~54 통영'에선 이중섭 생애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흰 소>, 종이에 유채, 1953-54, 34.2 x 53.0, 개인소장© News1

<욕지도 풍경>, 종이에 유채, 1953, 39.6 x 27.6, 개인소장© News1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한국에 홀로 남았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편지지 주위에 일본어로 '뽀뽀'를 둘러쓰기도 했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5부 '편지화'에 전시된 이중섭의 편지는 그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거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없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11월경, 종이에 펜, 채색, 26.5 x 21.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News1

<가족을 그리는 화가(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1953-54, 종이에 펜, 채색, 26.4 x 20.0, 개인소장 © News1

이중섭은 가족들과는 떨어진 채 홀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년 1월에 미도파 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이중섭은 개인전으로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점이나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지기 시작한다. 6부 '1954-55 서울'에선 서울 체류기에 제작된 작품, 미도파 화랑 개인전에 출품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된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 x 64.5, 개인소장© News1

<투계>, 1955, 종이에 유채, 28.5 x 4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News1

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가장’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 7부 '1955 대구'에서는 이 때 제작된 작품으로 구상을 위해 그려준 '시인 구상의 가족', 피를 흘리며 처절한 자신의 처지를 은유한 피 흘리는 '소' 등이 전시된다.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32.0 x 49.5, 개인소장 © News1

<소>, 1955년경, 종이에 유채, 27.5 x 43.0, 서울미술관 소장 © News1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 소설가 박연희(1918~2008), 시인 조영암(1920~?)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8부 '1956 서울(정릉)'는 작고 애잔한 정릉 시대의 풍경들로 이뤄져 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6, 종이에 크레파스, 유채, 14.0 x 19.5, Museum SAN 소장© News1 © News1

김 학예연구사는 "이중섭은 스스로를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 칭했다"며 "이중섭의 삶과 예술은 분리가 안 되는데 그의 그림에는 당시 겪은 상황이나 심리가 솔직하게 반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중섭의 작품에선 우리나라 전통미술의 기법이 서양 유화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고도 했다. 4000~7000원(덕수궁 입장료 포함). 매주 월요일 휴관.

다음은 4부 '1953-54 통영'에 전시된 이중섭의 대표작인 '소' 연작들의 모습이다.

박창욱 기자(c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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