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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기억을 파고드는 서양화가, 김보민

2015.12.14

[머니위크] 박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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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김보민 작가

#.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세상에 산다. 우리는 서로 타인이고 일종의 섬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접선을 시도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모든 순간이 끝나고 난 뒤 남는 것은 기억뿐. 같은 공간 속에서도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은 서로 다르게 남는다. 어떤 기억은 소멸하지만, 잊으려 하는 기억은 더욱 각져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든다. 기억은 의도할 수 없다. 그래서 기억은 능동이 아닌 수동태다.

서양화가 김보민 작가(30)는 기억의 단상을 캔버스에 담아낸다. 기억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 대입해 그려넣는다. 시간과 계절이 없는 곳. 닫힌 듯 열려있는 공간. 그곳은 김 작가가 그려낸 기억의 공간이다. 그 속에는 무심한 듯한 관계도 존재한다. 김 작가가 그리는 기억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기억 환기, acrylic and oil on canvas, 72.7 x 90.9(cm), 2014. /사진제공=김보민 작가

◆붓뿌리에 기억의 거름을 뿌린다

“저에게 오늘은 인터뷰한 날, 이 공간은 인터뷰한 장소로 기억될 겁니다. 기자님에게는 잊혀질 시간과 공간이 될 수도 있겠죠. 이렇게 같은 공간, 동시에 발생한 사건인데도 각자가 느끼고 기억하는 것은 다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망각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각인되며 어떤 이에게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공간과 사람이란 객체가 제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죠.”

기억은 김 작가가 집중해온 소재다. 기억의 파편을 화폭에 담아 관람객들이 깊은 사색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김 작가가 다루는 기억은 ‘관계’라는 매듭을 풀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사람이라는 객체를 조망하며 ‘기억’이란 주제로 다가간다.

“기억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부정적인 기억은 떨쳐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기억은 추억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죠. 이렇게 의도와 달리 남겨진 기억을 모티브 삼아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채집하는 느낌으로 배치합니다. 그림 속 공간은 실재하는 곳이 아닌 꿈 속에서 본 듯한 공간을 기억해 만들어냈고요. 이어질 듯 끊어진 공간으로 헤매고 압박받는 느낌을 표현해봤어요. 이 공간에 의지와 무관한 기억들을 그려 넣습니다.”

그림을 보는 관객은 그림 속 객체의 정면을 볼 수 없다. 김 작가는 다양한 객체를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얼굴 정면보다 옆모습과 뒷모습을 주로 그린다. 김 작가는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의 형태로 익명성을 묘사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흐릿하고 먼 대상처럼 느껴지면서도 내 주변 지인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김 작가는 기억 속에서 ‘관계’를 짚어내고, ‘현대인’을 중심으로 관계란 개념을 함께 풀어낸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펼쳐내는 방식도 흥미롭다. 김 작가의 그림에는 ‘풍선’이 자주 등장한다. 둥둥 떠 있는 빨간색 풍선은 손으로 잡고 있으면 유지되지만 놓으면 금방 날아가 버리는 관계와 같다. 관계는 애착과 허무함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기억환기’라는 작품 속 선인장도 김 작가의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자주 돌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지만 방치하면 말라죽는 선인장은 풍선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만한 소외와 단절이 그림 속에 녹아 있다.

“기억도 결국엔 얽혀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거라고 봐요. 때론 누구와도 관계 맺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해요. 관계가 없다면 통증의 기억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저는 사람에게 애착을 가져요. 이 사람이 떠날까봐 무섭고, 영원하지 못 할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죠. 풍선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요.”

김 작가의 작품은 시공을 넘나든다.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 관객에게 특별한 정서적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대로인 것과 변한 것, 그리고 뒤섞인 것’이라는 작품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람의 다리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김 작가는 “과거 개한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를 떠올릴 때 다리의 통증부터 기억해낼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특정 정보가 부각되거나 축소된다”고 풀이했다.

홍익대 회화과 대학원에 다니는 김 작가의 작품에는 서울 토박이로 살면서 느낀 고독감이 세련된 모노톤으로 짙게 스며있다.

그대로인 것과 변한 것, 그리고 뒤섞인 것, acrylic and oil on canvas, 97.0 x 145.5(cm), 2014. /사진제공=김보민 작가

◆“교감하는 그림 그리고 싶어”

김 작가는 기억의 주체를 점점 확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김 자가 ‘자신의 기억’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최근에는 ‘타인의 기억’ 혹은 ‘공동의 기억’에 주목한다.

“저는 관계를 조율하고 변주하는데 피로를 느껴요.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그런 마음을 그림으로 풀어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은 세상과 저를 이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함께 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릴수록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어져요.”

미국 애드워드 호퍼 작가와 독일 팀 아이텔 작가의 작품이 김 작가의 작품 활동에 깊은 영감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김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닌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애드워드 호퍼와 팀 아이텔 작가의 작품은 쓸쓸하거나 적막한데도 이상하게 위로가 됐어요. 저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저는 그림을 통해 제 얘기를 하고, 어떤 사람이 제 그림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게 소통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대중에게 좀 더 와 닿을 수 있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김 작가가 요즘 듣는 노래는 가수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 가사에는 세상에 한발짝 더 다가고자 하는 김 작가의 심정이 담겨있다.

‘너는 다가오려 했지만/ 분명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해/ 도망치기만 했다… 그땐 미안했었다고/ 용서해달라고 얘기하는 날/ 그때까지 잘 지내자, 우리’

우리가 과거를 잊어버리려 해도 과거 자체는 영원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 전으로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 기억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틈입한다. 기억에 남는 것은 늘 마지막 모습이다.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을 통과하고 있는 그때 그 순간이 마지막이란 걸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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