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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화백(80)이 위작 의혹과 관련,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지난 6일 '이우환 작품 감정 위조서'로 미술시장이 발칵 뒤집어진 가운데에도 이 화백의 무서운 침묵이 이어져 주목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25일 이화백의 대리인을 맡은 최순용 변호사(법률사무소 행복마루)는 보도자료를 통해 "수사의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언론보도가 나오지 않기를 당부 드린다"며 "세계가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지켜보고 있다. 이우환 작가는 수사에 적극 협조할 자세를 가지고 있으니 언론에서도 수사의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아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 보도자료는 오는 28일 ‘샤또 무똥 로칠드 2013’ 와인을 발표하는 자리에 이 화백이 참석한다고 알려지면서 언론매체들이 이 화백의 인터뷰를 요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기자들과 이화백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화백이 기자들과의 대면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화백은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의 말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내가 보고 확인한 이우환 작품 중에서는 위작이 없다”라는 인터뷰 내용이 “내 작품은 위작이 없다”라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다"며 "작가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최순용변호사가 보내온 보도자료. 1. 현재 수사 중인 이우환 작품 위작 의혹사건과 관련하여, 이우환 작가는 본인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뉴시스] 박현주 | 2016.01.26
설치미술가 김홍년(57)이 12년만에 개인전을 연다. 한강 '세빛섬'에 거대한 '나비'작품을 내걸고 공공미술 설치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할 예정이다. 80년대 스타작가였다. 1983년 제1회 청소년미술대전 대상, 제 22회 호안미로 국제드로잉전 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화가이면서 경영자로도 변신했다. 92년에는 동양그룹 서남미술관 관장으로 활동했고, 인사동에 갤러리 도올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다, 미술시장에서 사라졌다. 199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공미술에 눈을 크게 떴다. 80년대 설치미술 대표그룹 '난지도'에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예술의 공리성에 빠진바 있다. 캘리포니아 크래어먼트 대학원에서 공공미술가로서 확장됐다. '대지미술의 거장' 크리스토프 교수를 만나면서다. 자연환경 자체를 미술품으로 응용한 대지미술 거장들의 수업을 들으며 공공미술에 눈뜬 그는 귀국후 시민들과 호흡하는 설치작업을 해왔다. 2007~2009년 ‘희망의 운동화’ 조형물이 대표적이다. 25일 전시를 앞두고 만난 작가는 "2003년 9월 전시 이후 똑 부러지게 개인전으로 보여 줄 작품이라고 내놓기 부끄러웠고 작품 성향과 맞아 떨어지는 전시장이 없어 전시가 늦어졌다"면서 세빛섬 전시에 만족스러워했다.
[역사 속 오늘]'빈센트 반 고흐 최대 이해자' 테오 반 고흐 사망.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 1월28일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내용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눈을 감은 지 120여년이 지났지만 프랑스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빈센트 반 고흐가 말년을 보내며 여러 작품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는 권총으로 스스로 자해한 뒤 이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재정적 지원자이자 그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게 한 1등 공신인 테오 반 고흐도 이 곳에 그의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테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빈센트 반 고흐는 없었다'로 평가될 만큼 테오 반 고흐가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빈센트가 화랑 판매사원, 전도사 등 진로를 여러 번 바꾸다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테오의 권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그림 판매상으로 자리잡은 테오는 통찰력있는 투자가였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후원자였고 폴 고갱·폴 세잔 등 당시 파리의 신진 작가 작품을 거래했다. 그는 형의 그림도 유명해질 것으로 확신했다. 테오를 제외한 가족들은 감정조절에 미숙했던 빈센트에게 등을 돌렸지만 그는 형을 이해했고 죽는 날까지 헌신적으로 돌봐준다. 둘은 700여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은 두 사람 사후에 책으로 출간돼 두 형제의 관계와 빈센트의 심리 상태를 알게해 준다. 테오는 미술 재료값을 제외한 생활비로 매달 200프랑씩 빈센트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우체부의 월급이 약 135프랑인 점을 감안하면 적잖은 수준이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는 대신 그의 그림을 동생에게 선물로 건넨다. 테오는 이 그림들을 자신의 집에 걸어두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전시하는 데 힘쓴다. 프랑스 아를에서 귀를 짜르는 등 평범한 삶을 사는데 실패한 빈센트를 마지막 안식처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살게 도와준 것도 테오다. 죽기 전까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문 빈센트는 그곳에서 생애 최고의 걸작들을 남긴다. 하지만 빈센트는 정신질환을 이기지 못한 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 테오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둔다. 형의 죽음을 목격한 테오도 6개월 뒤 충격으로 인해 눈을 감는다. 생전 빛을 못봤던 빈센트의 그림은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 봉허에 의해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빈센트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수십년이 지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게 되고 그의 이름이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머니투데이] 박성대 | 2016.01.25
비가 내렸다. 억수같이 쏟아졌다. 정성껏 준비한 제주로의 첫 모녀여행이었다. 차를 빌리고 '두모악'으로 향했다. 이름 모를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창 너머로 몇 발자국 안될 법한 작은 도로가 눈에 띄었다. 문득, 그리고 싶어졌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이경 작가(44) 명함 뒤편을 장식한 작품,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두모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첫 모녀여행이었어요. 게다가 제주도 여행인데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겠어요. 배는 고픈데 비가 내려 심난한 상황이었죠. 작품은 여행 후에 그렸어요. 볼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요. 힘든 상황이어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잖아요." ◆일상의 풍경서 '한국적인 것' 관조 하이경 작가는 일상의 풍경을 소재로 삼는다. 그에게 일상은 현대인의 삶이다. 그는 이를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통상 고궁·도자기 등을 '우리 것'이라 여긴다. 몰개성적이고 색 없는 도시의 풍경은 '주변의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활인이 이 무미건조함을 거부하긴 힘들다. 그것은 분명 현대인이 딛고 서 있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저도 한 남자의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예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해요. 쳇바퀴 도는 삶을 살죠. 때론 염증도 느끼고요. 하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 위안을 얻기도 해요. 긴 여행 후 집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이랄까요."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집 앞 어두운 밤거리가 많다. 주중에 집 앞 낮 풍경을 볼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우리 대부분은 새벽 버스·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하루 밥벌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두컴컴한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앉아있다. 이 길을 포기할 수 있는 생활인이 얼마나 될까. 피하고 싶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현대인의 숙명. 하 작가는 이를 관조한다. 사실 하 작가도 대학 졸업 후 첫 10여년간은 '미생'이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작가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러 직장을 다녔다. 과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잊혀져 갔다. 반복되는 일상에 숨막혀 하고, 때론 익숙한 틀 안에서 안도하며 지냈다. 직장인·엄마로서의 삶이 그를 지배했다. 대학시절까지 쌓아온 예술적 감수성은 희석돼 갔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 동문의 전시장에 갔어요. 작품을 봤죠. 순간 '퍽' 하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작업하고 싶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죠. 2007년, 다시 그림을 시작했어요."
[머니위크] 서대웅 | 2016.01.25
박철희 중국 베이징 문 갤러리 대표(42)가 북경수도사범대·중국 사천 러산사범대 초빙 교수로 위촉됐다. 중국 두곳의 예술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가르치는 첫 한국인 교수다. 서예가인 박철희 대표는 원광대 서예과 졸업후 중국 남경예술학원에서 서예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지난 2006년 베이징에 갤러리를 열고 중국 현대미술작가들과 교류해왔다. 현재 '밀리언 달러작가'가 된 위에민준, 쩡판즈, 펑정지에등과 친분을 쌓아 국내에서 전시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찰스 사치가 주목해 중국미술시장에서 급성장한 펑정지에가 제주도에 작업실을 짓고 제주시 저지리 문화예술마을에 외국인 작가 1호로 등록하게 한 장본인이다. 문 갤러리는 한국화가 이길우(중앙대 교수), 서양화가 이흥덕, 김진관의 개인전을 열며 한국 작가들을 중국에 소개해 왔다. 박철희 대표는 "북경수도사범대에는 대외교류처 연관이 있어 앞으로 한 중 대학간 예술교류를 적극 추진할 예정"이라며 "한국의 미대생과 작가들의 중국 진출에 가교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문갤러리는 아트센터를 운영하며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뉴시스] 박현주 | 2016.01.25
[역사 속 오늘]노르웨이 대표 미술가 '에드바르 뭉크' 타계. 2012년 5월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장.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최고가가 경신됐다. 낙찰가는 1억1990만달러(약 1439억원), 작품명은 '절규'(Skrik·The Scream). 현대식 미술관 하나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거장 '에드바르 뭉크'다. 생과 죽음의 문제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있는 고독, 불안 등을 다뤘던 그는 1944년 1월23일 "내 몸이 썩으면 그 위에 꽃이 피고 나는 꽃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뭉크가 현재까지도 언급되는 이유는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모든 열정과 재능을 예술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리고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뭉크는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 노르웨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의 옛 이름)에서 가족들과 함께 다락방을 전전한다. 뭉크의 어머니와 누나 소피아는 각각 1868년과 1877년 결핵으로 사망하고 나머지 동생들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산다. 뭉크 자신도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몸이 아파 학교를 자주 쉬던 그는 혼자 시간을 보내며 그림의 매력에 빠지게 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슬픔, 분노, 절망과 같은 감성을 캔버스에 담았다. 굵고도 흐릿한 경계선과 직선보단 곡선으로 공간을 채우며 특유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이후 베를린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뭉크는 1893년 절규 첫 작품을 완성한다. 이는 뭉크가 직접 겪었던 공황발작 증세를 모티브로 삼았다. 그림에 나온 붉은 하늘, 일그러진 수평선 등은 뭉크에겐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절규는 현재까지 4점이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같은 장면이지만 두 점은 유화, 나머지는 각각 파스텔과 크레용으로 그렸다. 크레용과 유화는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이, 또 다른 유화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2012년 경매된 파스텔 작품(1895)만이 개인 소유다. 절규는 20세기 팝아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앤디 워홀도 절규를 응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사망 뒤 그의 유언에 따라 작품 2만여점이 모두 기증됐고, 탄생 100주년이자 사후 19년인 1963년 오슬로시에 뭉크 미술관이 개관한다. 노르웨이 정부도 국민화가인 그를 기리기 위해 1000크로네 지폐에 그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 [email protected]
[머니투데이] 박성대 | 2016.01.23
'핀란드 사진 거장' 펜티 사말라티(65)의 한국 첫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20일 개막했다. 전통 흑백사진과 은염 인화의 장인으로 유명한 사말라티는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까르티에-브레송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아 더 유명해졌다. 1971년 20세에 첫 개인전을 가진 뒤 전문 사진작가로 한길을 걸어왔다. 스스로를 북극, 고요, 추위 그리고 바다를 좋아하는 ‘방랑가’라고 소개한다. 공근혜 갤러리는 "유럽과 미국의 갤러리들이 그의 전시를 유치하기도 힘들지만 작품이 팔려도 늘 “여행 중” 인 작가와 연락이 닿지 않아 애를 먹는다"며 "이번 전시는 2년 만에 작가에게서 답을 받아 성사됐다"고 밝혔다. 여행이 작품활동이다. 스칸디나비아부터, 시베리아를 통해 구 소련, 일본, 인도, 네팔, 모로코, 터키를 거쳐 유럽 전역과 영국 그리고 남아프리카까지의 여행은 '러시아의 길'(The Russian Way.1992)시리즈로 탄생돼 그를 인기사진가의 반열에 올렸다.
[뉴시스] 박현주 | 2016.01.23
리차드 기어, 마돈나, 나오미 캠벨 등 세기의 아이콘을 탄생시킨 천재 사진가 허브릿츠 사진전 'HERB RITTS : WORK 할리우드의 별들'이 오는 2월 5일부터 5월 2일까지 세 달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할리우드의 패션과 문화를 이끌었던 천재 사진가 허브릿츠(미국, 1952-2002)는 스타들의 사진과 명품 패션 화보, 인간의 몸을 주제한 작품들로 할리우드의 전설을 만든 20세기 대표 사진가이다. 이번 전시는 특별히 허브릿츠 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는 100여개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로 국내에서는 처음 개최된다. 사진작가였던 그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다양한 뮤직비디오도 연출한다. 마돈나, 크리스 이삭, 브리트니 스피어스, 머라이어 캐리 등 그가 연출한 세계 톱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는 관능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연출로 지금까지도 최고의 영상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그의 독특한 작품들과 직접 연출한 10여 편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 한편 4일 개최하는 개막식에 허브릿츠 재단의 회장이자 허브릿츠의 어시스턴트였던 마크 매케나(Mark McKenna)와 프랭크 콘시딘(Frank Considine) 큐레이터가 참석한다. 사진은 MadonnaⅠ, San Pedro 1990, gelatin. 이탈리아 보그 매거진 인터뷰에 실린 이 사진은 허브릿츠가 가장 즐겁게 작업했던 순간으로 꼽은 작품이다. 이탈리아 의 인터뷰 기자와 여행 책자에 실렸던 이 작품은 LA 남부의 오래된 극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촬영은 밤 10~11시까지 이어졌지만 허브릿츠는 그 시간 동안 마돈나가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고 회상한다. 2016.01.21. (사진=디투씨 제공)
[뉴시스] 뉴시스 포토 | 2016.01.22
[인터뷰]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1980년대 민중미술 알리는 전시적 참여 및 기획.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심장은 아직 1980년대의 외침으로 고동친다. 유 교수는 1993년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대변한 전설적 평론가였다. 이 같은 훈장을 배경으로 그는 2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2: 리얼리즘의 복권' 전 기자간담회에서 강연을 맡았다. 그는 이 강연에서 "이제는 '예비역'이지만 '현역'으로 조만간 복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민중미술 등 리얼리즘계열 작가전 기획에 공동 참여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권순철, 신학철, 민정기, 임옥상, 고영훈, 황재형, 이종구, 오치균 등 민중미술 등 리얼리즘 계열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유 교수는 "이 사람들은 대체로 전업이고 백수였으며 교수가 아니었고 화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며 "인간으로서 사회성이 없었지만 테크닉은 귀신 같았고 정확하게 그리는 사람들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종구 작가를 소개하며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날 적 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정말 농사꾼 ‘간지’가 그대로 살아나게 진국으로 그렸다”고 했다. 그는 "오는 8월쯤 인사아트센터에서 민중미술에 집중한 전시회를 기획할 것"이라며 "이들 작가, 그리고 민중미술과 움직이는 인생을 언제나 대변하겠다"고 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진보적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술변혁 운동이자 사회변혁 운동이다. 시대와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면모에 천착한다는 의미에서 리얼리즘과도 접점을 맺는다. 민중미술은 화단을 지배한 추상미술, 모더니즘사조를 배척한 저항의 횃불이었다.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해 노동가의 삶을 알리고, 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과 연대했다. 유 교수는 "과거에는 아주 예쁜 그림을 그려 파는 것이 제도권 미술이었다"며 "(80년대에) 진짜 예술성을 '팔려는' 작가들은 왜 우리의 그림이 일상을 떠나야 하느냐는 고민을 했다"고 회고했다. 유 교수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교두보인 '그림마당 민'의 운영위원장이었다. 150여명의 진보적 미술인들이 모여 만든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주도로 1986년 문을 연 상설 전시관이다. 유 교수는 그림마당 민에서 민중미술을 홍보하고, 작품을 대신 팔아 주기 위해 발로 뛰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중미술이 언젠가 반드시 후대에 높은 가치를 평가받을 것라고 애호가들을 설득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국내 유적·유물에 집중한 미술사학자의 정체성을 갖기 전까지 '민중미술 투사'였던 셈이다. 유 교수는 그림마당 민에서 못 다한 숙제를 남겼다. 1986년 이곳에서 열린 첫 초대전인 목판화가 오윤(1946-1986년)씨 기획전은 성황리에 끝나며 민중미술의 기치를 드높였다. 하지만 오씨는 전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 유 교수의 가슴 한 켠을 아직도 저미게 하는 비보다. 그림마당 민도 1994년 재정난으로 무너졌다. 유 교수는 작고한 목판화가 오씨와 그의 동료·후배가 중심이 된 '오윤과 친구들'을 자신의 전시 기획 주제로 삼고 있다. 유 교수는 그러나 흔히 규정된 민중미술의 특징에 대해 단호하게 거리감을 뒀다. 유 교수는 "그간 민중미술과 관련해 도마에 오른 작품들은 '못그린 것'들이었다"며 "조형적으로 난폭한 것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어떤 미술 사조를 보더라도 '못 그린 그림'은 다 존재했다"고 했다. 민중미술이 이른바 '후진 미술'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정면 반박하면서 조형적으로 탁월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론 30년 된 민중미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한번 갖고 싶었다"며 "그동안 멸시 받은 것도 억울한데 (민중미술을) 띄워야겠다. 내 영혼을 바쳤다는 생각도 해 본다"고 농을 던졌다.
[머니투데이] 김지훈 | 2016.01.22
조각가 심문섭(73)이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회고전같은 개인전을 연다. 오는 29일부터 'Represent : 심문섭의 조각 회화 사진-항해일지'를 펼친다. 심문섭은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작업으로 한국 현대 조각계의 새 지평을 열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시스] 박현주 | 2016.01.22